nokcha
일본이 발표한 일본인의 기원 본문
인류학 권위자인 일본 국립 민속학박물관의 고야마슈조 교수는
1984년 일본인류학회에 보고한 내용
”죠몬시대의 인구”라는 논문에서 ”죠몬말기(기원전 약 3세기) 일본 총인구는 극심한 추위 등의
영향으로 겨우 7만5천8백명에 불과했고,
그후 야요이시대에 접어들자 59만4천9백명으로 급격히 늘었으며,하지키(김해 토기)를 사용한
나라시대(710~784)에는 무려 5백39만9천8백명으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인류학자 중 세리자와 죠수케씨는 죠몬말기의 인구를 약 12만명,
야마우치 세이오씨는 약 15만명으로 추계했다.
이로 미뤄 야요이시대 초기에 일본 인구가 급증한 것은 고대 한국인이 한반도에서 대거 진출,
벼농사로 식량이 풍부해졌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애리조나대학 유전학자 마이클 해머교수는 ”기원전 4세기께 한국에서 건너간
야요이인들이 조몬인과 아이누족을 물리치고 일본의 주인이 됐다”고 발표했다.
메이지시대의 인류학 및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씨는 ”현대 일본인은 조선반도에서
야요이문화와 함께 도래해 선주민인 아이누족을 축출,고유 일본인으로 파생하였고
선주민은 현대 일본인 선조와는 연고가 없다”고 설파했다.
일본왕족 만다친왕은 815년 저술한 ”신찬성씨록”에 신별(신령씨족),황별(천황가문),
제번(도래인)을 분류하고 한국인이 3분의 2를 점했다고 기록해놓았다.
NHK의 ”쌀, 알려지지않은 1만년의 여행”이라는 다큐멘터리
수전 벼농사는 야요이시대에 이르러 도래계에 의해 300년만에 전체에 열도에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일본고고학회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회장(규슈대 명예 교수)은 “일본 야요이시대(BC3∼AD3)에 영산강 유역을 출발로 하는 벼농사법을 요시노가리 유적’(吉野ケ里遺跡, 1989.1 확인) 등 일본 규슈땅으로 가져다 준 한국의 벼농사 문화는 그 이후 쌀농사가 일본에서 정착하게 했다
사학가 네즈 마사시 - nezu masashi : ”고유 일본인(固有日本人, 본래부터 일본에 살아온 선주민)은 석기와 토기를 사용해 채집과 사냥 및 고기잡이 활동을 했다 즉 한국인이 벼농사와 철기 청동기 및 노비 제도의 사회조직을 가지고 우선 기타큐슈에 들어왔다. 그 결과 일본에서 벼농사가 퍼지게 됐다
기타큐슈의 고분(무덤)에서는 한국인과 중국인에 가까운 고분인(古墳人)의 뼈가 나오고 있고, 그 자손이 현대 일본인이 됐다 또 6∼8세기의 아스카(飛鳥), 나라(奈良)시대에도 많은 한국인이며 중국인이 일본에 도래했으므로, 한층 더 그들에 가까운 것이 됐다”
(ねずまさし ‘天皇家の歷史’[上] 1989)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기타큐슈의 옹관묘 유적 출토품으로는 청동 제품이 많다.
이 출토품들은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주로 조선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北九州と南鮮’[日本の歷史] 1980)고 했다.
특히 한반도 도래인들의 고대 일본 지배 배경은 일본 기타큐슈 지방을 주축으로 진출하면서 벼농사를 비롯한 청동기며 철기 문화의 일본 전파가 그 바탕이 됐다.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 사토시 호라이 박사는 “한국인과 본토 일본인의 유전적 거리는 거의 영(0)이다”고 논문에 썼다. 즉 2,300년 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과 일본 원주민이 섞이면서 야요이 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가 시작됐고 융합이 서기 600년까지 계속되면서 현대 일본인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이주자들은 처음에 일본 규슈 지방에 먼저 정착하고 이어서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로 이주했다.
일본 돗토리 대학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 교수팀은 2003년 더욱 확실한 증거를 발표했다.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 전래로 상징되는 야요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전자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이노우에 교수팀은 야요이 시대 유적인 돗토리 현 절터와 사가 현에서 출토된 야요이인 유골 4점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했다. 그 결과 한국인과 혼슈의 일본인이 동일한 집단에 속했다. 유골이 발견된 돗토리 현은 동해와 맞닿은 혼슈 지방의 해안 도시이고, 사가현은 규슈 지방 북부에 있다. 두 곳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다.
일본에는 수만 년 전부터 동북아시아에서 들어온 아이누족, 류큐인 등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수렵이나 채집 생활을 했다. 기원전 4∼5세기경 한반도를 통해 도래인이 건너가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 및 토기 문화를 전파하면서 일본에서는 비로소 농업 혁명이 시작된다. 일본 문명의 원형이 만들어진 야요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가 남한, 중국, 혼슈 지방에 사는 일본 본토인, 오키나와인,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 등 모두 293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본토 일본인의 23%, 한국인의 27%가 같은 유형을 갖고 있었다. 반면 본토 일본인과 중국인은 서로 겹치는 유형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었고, 본토 일본인과 아이누 족은 같은 유형을 가진 사람이 6%에 불과했다.
일본 역사학자 미즈노 유우(水野祐)는 그의 저서 ‘일본 고대 국가 형성’(고단샤·1978)에서
최초로 일본을 지배한 천황은 백제인의 후손인 15대 오우진(應神·4세기)천황과 16대 닌토쿠
(仁德·5세기)천황 부자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오우진 천황이 백제 복식을 입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이들 천황 부자에
의해 고대 일본의 가와우치(河內)왕조가 세워졌다고 주장
’부상략기’ 기록에 따르면, 당시 15대 오오진(응신)왕이 일본왕 최초로 한복(백제조복)을 입었으며, 그 후에 대대로 일본왕들이 입었고, 33대 스이코(추고: ?∼628년) 여왕 등극 때에는 참여한 만조백관 모두가 백제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18세기 고증학자 토우테이칸 은, 고대논문 「일본결척」을 인용하여 “응신왕 시대에 백제왕이 봉녀(縫女) 2명을 보내주어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이었다”고 지적했다.
여왕 등극 때에는 참여한 만조백관 모두가 백제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교수, “26대 게이타이 천황,백제 무령왕 친동생”
가토 에이코(加藤瑛子)교수 “26대 게이타이 천황,백제 무령왕 친동생”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 ) 교토대학 사학과 명예교수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국보급인 고대 ‘신찬성씨록’을 자택 서재에 보관하고 있다. 우에다 교수는 “비다쓰 천황은 백제 왕족입니다”라고 확언했다(2004년 7월11일).
하야시 세이고(林靑梧)는 그의 저서 <일본서기의 암호>에서 “일본 왕통 혈족의 만세일계
(萬世一系) 세습제부터가 날조이며, 일본 개국왕은 김수로왕 후손임은 상식인데도 이를 부정,
징구왕후라는 유령을 내세웠다”고 밝혔다. 또 “임나일본부 설치를 날조했을 뿐 아니라 오오진(應神)
왕이 백제계 부여(夫餘) 후왕인 의라(依羅)이며, 기토라 고분의 40대 텐무(天武)왕은 신라 김다수(金多遂)임에도 일본인으로 변조했다”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 ... 나라시대(奈良時代-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
(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고 말해 전체적으로 일본고사기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구마모토 대학 시미즈 기요시(淸水記佳) 교수 ‘아나타는 한국인’에서 “오늘날 일본어의 모어
(母語)는 한국어이며,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신화와 전설은 전부 고대 한국인의 이야기다”고 말했다.
토쿄대 사학과의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교수 ”일본은 고대 한국인이 세운 나라이다”(‘日本國家の起源, 1967)
카큐슈우인대 오오노 스즈무(大野 晋, 1919∼) 교수
”한국인은 일본열도에 금속 제조및 사용법 야금·금공 기술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
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조경술등 모든것을 가져왔다(‘日本語の 世界’, 1980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인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교수는 ”조메이천황은 ’백제(구다라)
천황(百濟天皇)’이라고 말한다 .” 라고 1970년 ’신찬성씨록 연구’를 발표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2012년 11월 1일 일본의 종합연구대학원(가나가와현) 등이 포함된 연구팀은
연구결과를 일본 인류학회가 편집한 국제전문지(저널 오브 휴먼 제네틱스) 인터넷판에 발표했다.
도쿄대학과 종합연구대학원대 등으로 구성된 연구팀이 이 같은 연구결과를 종합해 발표했다
국립 유전학 연구소 등의 연구로, 아이누 민족과 오키나와의 사람들은 유전적인 특징이 비슷한 것을 알았다.전문지 「저널·오브·휴먼·제네틱스」11월 1 일자로 발표했다.
혼슈에서는, 죠몽인과 대륙으로부터 온 야요이인과의 혼혈이 보다 진행되었지만, 남북으로 멀어진 지역에서는 죠몽계의 유전적 특징이 많이 남은 것은, 지금까지 여러가지 형태학과 유전학의 연구로 알고 있지만,
이번 연구는, 죠몽인과 야요이인의 혼혈이 일본인의 기원으로 하는 설을 재차 증명했다.
이번, 유전연과 도쿄대등이 주목한 것은, DNA안의 1개소의 염기만이 변이한 SNP(스닙)의 특징이다.일본의 혼슈등의 사람 243명, 아이누 민족 36명, 오키나와의 사람 35명으로 중국인(북경의 한민족)등과 SNP 약 90만 개소를 비교했다.
이 결과, 아이누 민족의 유전적인 특징은, 오키나와에 대대, 살아 온 사람에게 가장 가까웠다.유전적인 가까움은 그 다음에, 혼슈등의 사람, 한국인, 중국인등의 순서였다.한편, 혼슈등의 사람은, 한국인이나 중국인과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지금까지의 형태학 연구안에는, 옛부터 오키나와에 살고 있던 사람이라도, 아이누 민족과는 약간 다르다고 하는 결과도 나와 있다.
일본인류 유전 학회 ttp://anthropology.jp/board/newspaper/newspaper_archive/20121101.html
마이니치 신문(도쿄 본사판) 2012년 11월 01일 조간
일본인:아이누는 류큐인과 근친 DNA 배열의 해석으로 판명
http://mainichi.jp/select/news/20121101k0000m040086000c.html
아이누와 류큐는 죠몽형 일본인의 유전 계통, 게놈 해석으로 증명
2012.11.01 08:05 과학 - MSN 산케이 뉴스
http://sankei.jp.msn.com/science/news/121101/scn12110108070000-n1.htm
12년에 발표 된 국립 유전학 연구소 의 연구 발표는 지금은 삭제 되었고 다른 내용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쌀의 경로라든지 기원도 혐한 일본인의 주장 하는 내용으로 대폭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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