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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 지그프리드 겐테의 견문기의 대한 제국 본문
내가 서울에서 몇 주간 머물던 숙소 바로 건너편에 조선왕(고종황제)이 거처하는 궁궐(덕수궁)의 동문을 바라보면서 이 문를 통해 들락 거리는 형형색색의 의상 행렬을 보고 있노라면,마치 어렸을적에 동화를 들어면서 환상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던 바로 그 기분이었다.중국의 황제처럼 대한제국의 황제도 백성들이 잠자리에서 한참 자고 있을 자정이 되어야 정사를 보기 시작하는데,이는 이 어려운 국사를 조용히 심사숙고하면서 처리 해야 하기 때문인듯 하다.
이러한 국왕과 운명을 같이해야하는 이 나라의 불행한 대신들은 매일 남이 잠을 자는 자정이 되면 일어나서,예복으로 차리고 인적이라고는 없는 긴 대로를 지나 조정으로 들어가야 한다. 서울의 밤거리는 정말로 한적하다.어쩌다가 야간을 이용해서 외출을 나서는 여인들 외에,어디서고 정적 뿐이다.이 나라 양반은 밝은 날에는 음식과 술상을 준비해서 자연을 찾아가 기생을 데리고 연희를 즐기지만 백성은 밤에 모여서 즐길 줄을 모르는 듯하다.
불이 다 꺼져 어두운 서울 성안에 정동쪽 궁궐에서만 매일 밤마다 불빛이 휘영청 밝고 피리와 가야금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복이 많은 이 나라 왕이 나라에서 가장 예쁘고 영리한 처녀들 중에서 선택한 궁녀 300명과 함께 즐기는 연회에 대해서 떠도는 별별 풍문에 의하면 중국 황실의 향연은 조선의 잔치에 비해 어느 모로나 떨어 지는듯 하다.나도 궁궐의 연회에 몇번 초대 받은 적이 있는데 놀랍고 실망했던 것은 여느 유럽의 왕실 연회석상과 다른바 없었기 때문이다.-적어도 외국인이 참석한 연회는 언제나 그랬다.더 놀랐던 사실은 화려하게 장식된 식탁에 오른 값비싼 최고급 유럽식으로 완벽한 음식이었다.너무 비싼 음식이라 감히 상상도 못하는 "트뤼펠(프랑스의 고급 버섯으로 주로 멧돼지가 냄세를 맡아 찾아 내는데 송이 버섯 보다 귀함)"요리가 상석을 차지했고 이 나라 주인의 안녕을 위해 축배를 올리는 술은 프랑스산 "샴페인"으로 한 없이 나왔다.
물론 이러한 서양식 연회가 빈틈없이 준비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1895년 10월 일본 왕실의 치밀한 계획 아래에 미우라 공사가 일본인으로 조직된 낭인과 병졸들을 끌고 왕궁으로 쳐들어가 이 나라의 왕비(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칼로 난자해서 불에 태운 야만적인 사건이 있었다.겁에 질린 국왕은 궁녀의 가마를 타고 러시아 공간으로 피신을 했는데(아관파천)그곳에서 공사의 처제인 안토니에 존탁 여사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종이 환궁을 할 때 이 알사스(당시 독일 점령지)태생의 존탁 여사가 동행을 했고 이때부터 존탁 여사는 궁내"서양"예식의 담당관이 되었다.존탁 여사는 궁내 유럽식 연회 준비외에도 관여하는 데가 많았다.지금 정동 궁 안 한곳에 부산하게 짓고 있는 신궁(석조전?)도 존탁 여사의 의견을 수렴한 건축 공사로 러시아 공보관보다 더 화려하게 지을 계획이다.그러나 이 신궁에서 왕이 거쳐하게 될지는 수수께끼이다.
이 나라의 왕을 배알할 영광을 얻었다.이 나라에 왔던 많은 유럽인들이 국왕을 알현하기를 원했는데도 몇 사람외에는 행운을 얻을 수 없었다.그런데 내게 이런 영광이 온것은 물론 우리 독일 영사인 봐이퍼르트 박사의 영향도 있었다.어쨋던 나는 행운아 였고,어느날 어느 시에 입시하라는 전갈도 받았다.우리"독일"인의 배알이 있기전에 영국 대사와 함께 동양 해상의 전권을 쥐고 있는 해군 함장 브리지 장군과 그 일행의 알현이 있었는데 영국인들이 뒷걸음으로 물러 나면서 문 앞에서 참배를 채 마치기도 전에 우리보고 들어오라는 표시를 했다.국왕의 배알은 너무도 자연 스러웠다.천자인 중국 황제는 백성이 두려워서 감히 얼굴도 쳐들지 못할 뿐만아니라 베이징의 입성조차도 완전히 금지 하였는데,이 나라 국왕은 완벽한 신사에,자연스럽고 억눌러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참 다정했다.
영사의 뒤에서서 궁중의 예식에 따라 허리를 깊히 굽혀 삼배를 차례대로 하면서 주의 깊게 곁눈으로 사방을 관찰했다.알현실의 내부 장식을 별게 아니였다. 전통적인 내실에 벽은 밝은 색으로 발랐고,벽에는 나무 액자에 든 프랑스의 판화가 몇 점,일본산 의자와,내부 장식에 비해서 너무 뚜껍고 혼란한 무늬의 기계로 짠 유럽산 보가 탁자에 깔려 있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듯,고개를 약간 숙여 예의를 차리는 세번째 절을 마친후 얼굴을 드니 내 앞에 아주 고급스런 의상을 입은 두 남자가 서있었다.황제(고종황제)와 황태자(순종황제)였다.황제의 오른쪽에는 두 손을 잡고 공손히 굽힌채로 선 통역관 내시가 서툰 영어로 국왕의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책상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서 본 조선 왕은 조선 민족 만이 가지고 있는 온갖 장점은 다 가지고 있는듯 했다.잘 생긴 모습에 자비 스럽고 인자해 보이고,이 인자하게 보이는 국왕의 수염은 양쪽을 꼬아서 약간 위로 올렸는데,조선에서 흔히 보는 염소의 수염처럼 가는 수염이 아니었다. 얼굴색은 창백한 편이였는데 궁궐 안에 갇혀 일년에 겨우 두어번 바깥출입을,그나마도 햋볕이 못 들어오게 꼭꼭 닫은 가마를 타고 다니는 신세라 당연하다. 우리의 대화는 그저 예절에 따른,서울 체류중에나 여행중에 불편함이 없었나,이 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봐주니 고맙다는 정도였고 나는 여행중 돌아보나 금년에 풍년이 들거라고 덧붙였다.황제의 활기에 찬 음성은 부드럽고 친절하기가 그지없어 우리의 맘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의 안녕을 위해 진심으로 애를 쓰는 태도가 여실해 보였다.가끔 왕자(순종)도 대화속에 끼였는데,왕자는 아버지 부왕에 비하면,마마흔적이 남은 얼굴로 좀 부은듯 하고 눈이 피로해 보였는데 왕사 17명에게 왕도를 배우느라 시달리고,젊은 궁녀들과 밤을 새다보면 이 또한 당연지사라 하겠다.
여기서 첨부할게 하나 있다.알현 며칠 후 영사가 내게 국왕이 하사한 훈장을 전했다.오늘까지 나는 과분한 이 영광이 왜 내개 내려졌는지 수수께끼를 못 풀고 있다.이 훈장은 이 나라에 공훈을 한 사람에게 내려진다는데 한문으로"대한제국의 황제가 기련은장을 수여한다"는 내용에 일자는 광무 5년 1897년이라고 적혀있다.
끝으로 웃지 못할 우스운 이야기를 들은 대로 하나 전하겠다.한 대신이 유럽 아가씨들로 부터 매일 문의 편지를 한 광주리로 담을 만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고종황제의 비(妃)가 될 수 없겠느냐? 는 내용이었다.수수께끼 같고 비밀에 가득쌓인 조선이 유럽의 일.월간지에 소개되면서 조선 국왕은 선망의 대상으로 등장했다.그래서 유럽의 젊은 아가씨들은 신비스런 이국의 왕 곁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동방의 아라비안 궁전을 상상했다.무슨 일이라도 하겠으니 국왕의 곁에만 있게 해달라는 서신 문의가 그 처럼 많이 온다니,이 나라 왕은 복에 복이 쌓이나 보다.
-독일인 지그프리드 겐테가 1905년 베를린에서 발간한 견문기 중에서-
서울에 또하나 이색적인 풍물이 있다.우유부단한 세월을 보내며 지내온 서울 성안에 전통을 깨고 여지껏 볼 수없었던 돌발적인 변화가 생겼는데 곧 군대의 개혁이다.원수가 없는 나라는 적이 없는 것이 당연한데 갑자기 나라를 방어해야하는 군대가 필요하다니! 조선에는 옛부터 징집을 했다는 기록이 어느 지방의 인구 조사에 나타나지만 상세하지는 않고,군복이나 또 무기의 종류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없다.
미국,러시아,일본인들로 구성된 교관들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신병들을 훈련시키고,군복과 무기 분야에서는 프랑스와 일본을 본보기로 삼고 있지만 대한제국의 궁궐을 지키고있는 호위병은 아직도 이 서구식 군율을 장난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모습이다.현재 서울에는 꼭 같은 군복을 입고 최신의 무기를 멘 서구식 부대로 아홉 연대가 있다.
전쟁이 없는 이 나라에 지금 9천명이라는 병졸이 평화 스런 서울"대촌(大村)"에서 할일 없이 돌아 다니고 있는데도 이 모습을 보면서 흥분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간혹 가다가 조선 사람과 중국인 사이에 심한 싸움이 벌어졌다가도 끝나면 그만이고,일본인과 냅국인 사이에 빈번이 일어나는 불상사에도 역시 누구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일본 사람처럼 양복을 입은 많은 병졸들은 그저 할 일 없이 거리를 서성거리기만 한다. 군대 역시 할 일이 없다.지루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 무기를 닦거나 정리정돈으로 소일을 한다.이 젊은 이들은 항상 명랑하고 만족한 인상을 준다.궁 앞에서 보초를 서면서도 웃고,수십 번 총을 다루는 교련을 받으면서도 웃는다.교련이 끝나면 집 기둥에 기대어 다음 식사 시간을 기다리면서 식탁에 오를 쌈밥과 김치를 생각한다.김치는 식탁에 빠지면 않되는 반찬인데,입에 넣기만 하면 혓바닥에 불이 이는것 처럼 화끈하게 맵다.헝가리,이탈리아인이 제 아무리 맵게 먹는다 해도 한국 김치에는 당할 수 가 없다.
조선의 신식 군복은 일본 군복을 모방했고 군모는 프랑스 군대의 테두리 없는 모자를 연상케한다.군복 상의는 짧고 몸에 착 달라붙게 만들었으며,견장은 노란색으로 장식해서"언문(한글)"한 그대로 연대 소속을 붙였다.검정색 바지끝은 짧은 흰색 면포로 발목에서 장딴지 중간까지 미치는 각반 안으로 집어 넣었다. 조선인은 전체적으로 잘 생긴 편이어서 이 서양식 군복은 일본군이 입은것 보다 더 잘 어울려 보이기는 하지만 군복을 손질하는데는 훨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군복을 만드는 천의 질이 나쁘기 때문이다.특히 엉덩이가 가장 먼저 해어지느데 이는 복무가 끝나고 쉬는 때에 이 나라의 습관대로 땅 바닥에 쭈그리고 앉는 데서 온다고한다.군화도 가지 각색이다.유렂에서도 군인들이 고통을 참고 신고 다니는 이런 끔찍한 가죽 군화가 조선 군대에도 보급되었는데 이 군화를 신고 몇차례 행군을 하고 나면 밑창이 떨어져나간다.평생 짚신만 신었던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는 크나큰 육체적 고통이 하나 더 가해진 셈이다.그래서 조선 군인들은 군무가 끝나면 날쌔게 짚신으로 바꿔 신는다.
눈에 뛰는게 또 있는데, 한국 군인들의 머리 모양이 제각기라는 점이다.서울 지방과 경기도,함경도에서 모이는 신병들은 머리를 박박 깎아야한다.그러나 평안도의 특수 군대는 전통적인 두발이 허용되고 있다.
이 처럼 요지경속 같은 한국 군대는 음악이 없으면 한 발도 움지이려 하지 않는다.나팔수 군악대는 한 소대 앞에서도 반짝 반짝 광채가 나는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앞장을 선다.이 군악대가 연주하는 음악은 행진곡이라기보다는 유치원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하면서 그저 뚜뚜 불어대는"어린이"군악대의 곡조 같다.보초 교대시 몇발자국만 가도 되는 곳에도 군악대를 동반하며,신병들이 훈련을 하려 나갈 때도 군악대를 앞세우고 간다.단순하고 쉴새없이 울려대는 나팔소리로 인해 가뜩이나 번잡한 온 서울 시내가 진동을 하는듯 하다.훈련 때도,행진 할 때도 음악이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을 만큼,음악을 좋아하는 조선신병들의 정서와 감수성을 여기서 엿볼 수가 있겠다.
-독일인 지그프리드 겐테가 1905년 베를린에서 발간한 견문기 중에서-
출처 : 진주성지킴이회 염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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