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kcha
일본, 또 하나의 한국 본문
'등잔 밑이 어둡다'는 우리 속담이 가장 잘 어울리는 데가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간의 관계다.
좋든 싫든 우리와 일본은 뗄 수 없는 역사적 관계가 있음에도 우리는 일본을 너무도 모르고 있다. 도대체 알려 하지를 않는다.
일본은 한반도 식민지 경영을 위해 우리의 풍수와 정감록이라는 민간예언서까지 연구한데 비해 우리는 어떤 일본 연구를 해 왔는지 돌아볼 때다.
일본 안에는 지금도 한반도 관찰자(코아 워처, Korea watcher)를 자처하는 사람, 이 타이틀을 직업으로 삼은 프로 저널리스트들이 기백 명이 넘는다.
그에 비해 우리는 정말 일본문제만을 프로로 전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는지 의문이다.
이런 지적 비중이 심한 불균형 속에서 부지영 전 동경특파원이 바쁜 일정 속에서도 틈을 내어 이처럼 깊은 일본 연구서를 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특히 부 특파원의 글은 단순한 수상도 아니고, 역사적 문맥에서, 그리고 지금까지는 시도되어 보지 않았던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전문가 못지않게 하나하나의 과제를 분석하며 접근한 깊이 있는 글이다.
보다 깊이 일본을 알 수 있고 글로벌 시대를 맞아 한일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많은 기여가 있을 것을 확신한다.
평소 우리는 일본을 무시하고 일본이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한 방어계획이라도 세울라치면 우리는 "또 저 사람들..." 하는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IMF 파동 때처럼 사단이 터지면 부총리가 제일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협의를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처지다.
우리가 이 같은 이중성(二重性)을 극복하지 못하면 언제나 '골목대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 부끄러워도 미워도 샘이 나도 우리의 갈 길은 뻔하다.
*이 책의 의도는 글로벌화 하는 세계 속에서 일본을 풀어헤치는 ‘해일론(解日論)’, 아예 틀 자체를 녹여버리는 ‘용일론(溶日論)’이다.
어쩌면 일본의 역사와 땅, 그리고 일본인까지 한꺼번에 ‘소화해 버리는’ 정신적인 탄일론(呑日論)이라고 해도 좋다.
*독도를 자기넨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논리대로라면, 일본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다.
일본은 고대의 우리 한반도인들이 개척한 동북아의 프런티어였으며, 지금의 일본은 그 위에 세워진 말하자면 동북아의 미국 서부, 혹은 동해의 LA 같은 그런 존재다.
... 일본어, 나아가 현재의 일본 그 자체가 고대부터 찬란했던 한국문명의 살아 있는 유적이라는 것이다.
*직감적으로 ‘아사히(朝日)’라는 일본어는 ‘아침 해’라는 한국어의 사투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유전적인 요소가 가장 강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의, 식, 주 등 인간생활의 다른 모든 기본적인 요소는 다시 만들 수 있고 고쳐지기도 하지만, 어맇 적에 한 번 붙어버린 말투와 억양은 평생토록 변하지 않는다.
... 언어(言語)만큼은 마치 DNA 속에서 선천적으로 유전된 형질인 것처럼 조금씩 변형은 되지만, 원래의 의미와 그 형태를 지니면서 전승되고 있다.
*일본 왕궁 북쪽에 해당하는 히라가와(平川)門의 비석에 ‘平川高麗門’이라고 적혀있다.
왜 日王의 궁성에 ‘고려’라는 우리의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일까? ... 한반도와 가장 오래된 연관을 갖고 있는 규슈(九州)지방에는, 高麗町, 高麗橋, 高麗通이라는 지명이 있고, 高麗岳이라는 산까지 있고 교토, 나라, 오사카 등의 킨키(近畿) 지방에서도, 오랜 한반도 삼국과의 교류에 의해 高麗町, 高麗橋, 百濟王神社, 百濟寺, 백제村, 백제驛, 백제교, 신라교, 新羅社, 王人博士공원 또 고구려 유민이 모여 살던 사이타마(埼玉)의 고마신사(高麗神社), 지금은 ‘고마에’로 읽는 高麗江, 고구려왕 若光王을 모시는 高麗神社를 달리는 전철역의 이름은 ‘高麗川驛’ 등이 있다.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兒島)현에 가면, 아예 천황이, 즉 ‘일왕’은 ‘金씨’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가야 김수로왕의 7왕자(니니기노미고토, 일곱 ‘임금님의 것’ 이라는 한국어에 해당)가 일본에 도래하여 다카치호미네(高千穗奉)에 강림한 후 궁궐을 지어 나라를 다스렸다는 전설과 古事記, 日本書紀 등의 기록을 토대로 ‘일본 발상의 땅’이라고 해서 비석까지 세워놓고 일본인들이 ‘모시는?’곳이다.
물론 신화의 상태이기는 하지만, 이 ‘니니기노미고토’가 2ㅣ대이고, 그 2대가 히코호호데미노미고토‘라는 7왕자의 자손, 제 3대가 ‘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고토’라는 이름의 7왕자의 손자이고 이 神代 3代를 지나 4대인 ‘神武天皇’이 천황가의 초대 人世 일왕의 시조가 된다. (동경대 명예교수 -에가미 나미오 의 학설발표-)
日王이 金씨였다면, 신사참배 귀신도 우리 ‘金씨’의 조상신이 된 셈이니 아이러니컬하다.
김씨만이 아니다.
규슈 지방에는 아직도 지반에 따라 檀君신앙이 부리 깊게 존재하고 있으며 南규슈 구시키노市에 있는 환단(桓檀)신사와 北규슈 후쿠오카縣의 히코산(英彦山)神宮은 우리 한민족의 조상인 단군신화의 환웅과 단군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朴’씨 조상을 모시는 곳도 많다.
나가타현 사도섬에 있는 시라기(白木)신사 가고시마현 다루미즈市 居世마을에 있는 居世神社, 시네마현 오다市 오우라 항구에 있는 카라카미시라기(韓神新羅) 등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사들이다.
19세기 이전까지도 박혁거세왕을 모시는 신사가 2,700여 곳이 있었으며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합쳐졌음에도 아직도 2,000여개가 산재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규슈, 긴키, 사이타마, 등 한국인을 조상신으로 알고 섬기는 곳이 이렇게도 많다.
결론은 일본섬 전체가 한국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일본학자들이 이미 연구해 놓은 자료들에 의하면, 일본 고대의 천황가에서는 百濟神인 韓神과 新羅神인 園神을 나란히 궁중 신전에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강가차제(江家次第, 1116년 간행)라는 역사서에 분명하게 기록이 나오는 이야기다.
그 후손의 궁궐 문패에 ‘한반도’를 듯하는 ‘고마(高麗)’의 도장이 찍힌 것은 더더욱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 많은 韓日 양국 학자들이 증명해 왔듯이, 일왕과 그 귀족들이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渡來人들이었다면, 그리고 그들이 나라(奈良)시대까지 몇 백 년에 걸쳐 사용한 언어가 고대 한국어였고, 따라서 지금의 일본어조차 한국어의 일본 사투리라는 것이 명확하다.
*일본 지방음식 속의 한국어 : 한국과 일본에 고춧가루가 전래된 것이 대략 6백여 년에서 5백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하니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1,500년 전의 ‘백김치 지도’도 분명 한반도를 중심으로 일본열도까지 미치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고 있던 셈이다.
... 전 세계인이 즐겨 찾는 일본식 초밥 스시(壽司:suahi)는 ‘꼴뚜기 젓’, ‘오징어 젓’할 때, 쓰는 우리말 ‘젓’의 일본어 사투리다.
... ‘소바’도 완전한 한국어의 일본어 사투리다.
... 같은 일본인이라도 관서지방 사람들은 잘 먹지 못하는 ‘낫도(納豆)’한국의 마르기 전 젖은 된장과 같다.
... 반찬과 양념이랑 수 있는 파나 된장, 김치는 또 그렇다 치자, 주식인 ‘쌀’은 ‘구마(熊)’, ‘고마(高麗)’가 연결되는 ‘코메(米)’다.
... 반찬부터 주식까지 모두 다 그렇다.
도대체 쌀밥과 김치, 혹은 ‘츠케모노’라고 부르는 야채 절임, 된장국에 두부요리를 1천년 이상 매일같이 질리지도 않고 주식으로 계속 먹어 온 곳이, 그리고 사람들이 한국과 일본의 한국인과 일본인 말고 이 지구상, 그리고 지구 역사상 어느 곳에 존재했는가. *唐書, 舊唐書, 新唐書에 의하면 ‘일본’이 정식으로 국호로 쓰인 것은 670년으로 백제(구다라)가 황산벌애서 신라(시라이)에게 패배하고 구원군인 일본 (야마토)군이 금강으로 추정되는 백촌강전투에서 패배한 후 일본으로 돌아와 이 같이 정해 역사에 기록한 것이 처음이다.
... 일본이 국가의 틀을 형성한 것이 7세기의 나라시대인 것을 감안하면, 일본은 건국이전부터 건국의 시기, 그리고 ‘나라’의 틀을 만든 ‘나라(那良)時代’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식민지’ , 즉 ‘한민족의 식민지’였다.
*“말은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는 말처럼, 어느 문화이건 간에 ‘말’과 ‘지명’만큼 그 원형을 담고 있는 그릇은 없다.
*1981년 ‘新 日本語 考 - 루트의 주변’이라는 책을 아사히(朝日) 신문사에서 발간했는데 내용은 “나라시대까지 일본의 중심부였던 나라(奈良), 교토(京都) 등 근기(近畿)지방은 한반도인의 식민지와 다름없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고인돌 시대’뿐만 아니라, 일본에 청동기 무기와 문화가 유입된 것도 한반도 루트였다.
... 한반도人들이 일본에 식민지를 건설한 나라(奈良)시대까지 한반도와 일본은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 해답은 자명하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부족국가, 고대국가에 이르기까지 무려 2천년 이상 일본은 한반도의 신도시 개발구역, 즉 한반도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부여는 漢代로부터 북만주의 松花江유역의 광대한 평야를 휘날리던 기마민족이었다.
남한 대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있었다는(後漢書, 漢傳) 辰王說에 의하면 부여족의 일부가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를 만들었고, 이 부여로부터 진(辰)왕조가 나와서 마한을 수도로 했으며 이 진(辰)왕조에서 백제와 현재의 일본 왕족이 나왔다(江上波夫)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부여가 아버지라면 고구려와 진왕조는 부여의 아들이자 서로 ‘형제’ 격이고, 백제와 일본 왕족은 부여의 손자뻘이자, 고구려의 조카 격이 되는 것이다.
... “임금(임금의 나라), 혹은 가라(加羅 : 가야)라는 곳에 辰왕조가 있었으며, ‘이곳에서부터’ 일본에 진출해 왜국의 왕이 됐다.”고 에가미 교수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라(奈良)時代 당시 지반별로 살던 일본인의 인구데이터를 산출한 결과, 당시 540만 명의 인구 중 거의 4부의1에 가까운 121만 명이 나라(奈良), 교토(京都) 등 킨기(近畿) 지방에서 살았으며, 그보다 서쪽인 지금의 츄코크(中國) 83만, 규슈(九州) 71만, 시코크(四國) 32만 등이 살아 이를 합치면 약 3백만 명의 인구가 나라, 교토의 서쪽 흔히 西 日本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밀접해 살았다.
지금의 동경을 포함한 관동지역은 전체가 1백만도 안 되는 94만 정도이고, 지금의 東北, 北陸, 中部 등은 각각 20만 명대였다.
나라(奈良)시대가 되기까지 일본 의 전인구는 60만 명 정도였다.
... 일본 열도는 한국인의 동진(東進)에 의해 사람들이 살게 된 ‘한국인의 서부 개척지’이자 ‘한국인의 프런티어’였던 것이다.
*한민족 직계의 대표적인 일본 姓씨들 : 일본인의 성씨가 이처럼 한국과 중국과는 달리 당시 관직명과 가족명 혹은 지방명 등을 융합한 것이어서 그 종류가 많고 다양하다.
가라구니(韓國), 가라히토(韓人), 가라야타베(韓矢田部-한국사람 밭 봐주는 사람), 모노베가라쿠니(物部韓國) 등과 구다라(百濟), 구다라노데비토(百濟伎-백제 예술인), 구다라이치(百濟氏) 또 고구려계 이민의 대표적 성씨는 고마(高麗), 고마(狛-고려), 고마히토(狛人), 고마하토누(狛人野-고려 사람들), 오고마(大狛-큰 고려사람), 한국식 성 그대로 외자의 성은 가우(高), 구레(吳), 후미(文)등이 그 예다.
신라왕 후손들의 대표적인 성씨로는 미야케(三宅), 다치바, 모리(橋), 이토, 지금도 일본 각지에서 ‘시라기(新羅)-새나라)’로 발음되는 白城, 白木, 白氣, 白築, 白記, 素木, 新良貴, 志良岐 등이 신라인의 후예 성씨이다.
‘신찬성씨록’에는 모두 326씨의 姓이 도래인의 姓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의 대다수가 한반도에서 ‘직접’ 넘어온 사람들의 姓이었다.
일본의 성씨는 통칭 13만 4천개 정도이다.
또 오토모(大伴), 오노(大野), 오베(大部), 오도리(大鳥), 아사고(朝來), 아사즈마(朝妻),아케(明), 아사아케(朝明), 오하라(大原), 나카무라(中原), 타나카(田中) 등이 ‘1천년 전의 한반도’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일본인들의 ‘이름’ 속에 살아있는 한국인들의 숨결이다.
*오사카(大阪) 인근의 셋츠(攝津)라는 곳이 실은 하시모토家의 本家격인 곳이다.
*姓氏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명을 조사한 결과 일본의 군, 시, 村명으로 川다음으로 많이 쓰인 단어가 이 田자 였다.
川은 전체의 6,3%인 242개소, 田은 5,9%인 225개소, 다음은 大로 172개소, 山 164개소, 野 145개소에 달했고, 島 119개 순이었다.
... 평야지대이며 일본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갖고 있는 니이가타(新瀉)縣의 경우 전체 지명 5,736개소 중 전(田)이 붙는 지명이 무려 962개소(일본지도총람)에 달한다.
거의 5분의 1에 육박하는 숫자다.
일본의 어떤 현이라도 ‘타’라는 한국어 ‘밭’의 일본사투리로 된 전(田)자를 붙인 곳이 7%이상은 된다는 말이 된다.
일본 전국적으로는 전(田)자가 붙은 지명은 전체 지명의 약 14,5%에 이르고 있다.
왜 이처럼 많은 곳에 이런 한국어 지명이 붙었는지 그 이유는 자명하다.
이런 지명이 붙은 곳일수록 옛날부터 발달된 농어지역으로, 일본열도 이주민 1세대들인 한반도인에 의해 개척되었으며, 그들이 스던 말, 즉 한국어의 일본 사타리 원조가가 된 ‘나라(奈良)말’이 그대로 남아 地名이 되고 나아가 姓氏가 된 것이다.
타나카(田中)는 당시 한반도인들이 ‘일본 개척지’에서 철을 만져 농기구를 만들고, 가장 중요한 경제생산 요소인 농업생산을 맡은 ‘개척 농민’ 계급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무라카미(村上)라는 姓의 무라는 한자인 촌(村)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이라는 한국어의 일본 사투리다.
'분류없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이라는 이름은 한국 사람들이 먼저 쓰던 것 (3) | 2024.11.27 |
---|---|
중국, '한국 낙화놀이는 중국 문화다.' (0) | 2024.02.20 |
역대급으로 표절당한 한국가요 (2) | 2024.01.22 |
세계 탑10 소프트파워 국가 순위, 해외반응 (2) | 2024.01.22 |
김치볶음밥이 일본에서 만든거라고 하는 일본인들 (0) | 2024.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