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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인은 허구의 고대사를 만들었는가? 본문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일본은 한국인을 일본열도에 선진문화를 제공해 주는 문화인으로 ‘동방예의지국’의 교양인으로 인식해 왔다.
일본은 3세기 말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몰락한 권력자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일본은 5세기 초에 백제의 아직기, 왕인 등으로부터 한자문명을 받아들였고 가야로부터는 철기문명을 전수받았다.
특히 16세기 후반에 일본은 조선에서 들어 온 ‘조선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의 유학자를 숭배하였고, 17세기까지 일본의 지도자 및 지식인은 조선을 선진된 문화국가, 예의국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일본인의 일반화된 이해는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일본인 안에서 서로 모순되는 이해가 표출되기 시작함으로써 급격하게 반전되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을 선진국으로 존경해 오던 기존의 이해를 뛰어 넘는 새로운 주장이 대두했다. 일본이 우수하다는 일방적이고 자구적인 사상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무사가문 출신의 양명학자 구마자와 반산(熊澤蕃山 1619-1692)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중국다음으로 우수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내 세운 논리는 간단하다.
일본의 시조신(설화에서 얘기하는 일본의 건국 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와 초대 진무천황(神武天皇)을 가장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일본인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높이는 방법으로 찾았다.
또 무사가문 출신의 군사학자인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1685)는 한걸음 더 나아가 중국, 조선보다 일본이 우수한 나라라고 주장 했다.
그가 내 세운 논리는 간단하다.
중국과 조선은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일본 천황의 혈통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으므로 일본은 국가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은 가장 안정된 나라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이야말로 진정한 아시아의 중심국가인 ‘중국(中國)’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무사출신 학자들의 주장이 널리 퍼지면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는 일본에 조선을 멸시하는 풍조가 번지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분위기가 상승되어 조선 ‘정벌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후반부터는 일본의 ‘국학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국학이란 도교, 유교, 불교 등 외래종교나 외래사상이 전래되기 이전에 있었던 일본의 고유사상과 신앙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일본의 국학계에서 모토오리
그는 의사였다.
취미로 일본역사를 공부 하면서 고사기(古事記: 712년 편찬: 말로만 전해 내려 오던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고 편찬한 일본의 신화집)와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 편찬: 후백제의 유민 태안만려(太安萬呂)에 의해 쓰여짐. 신라에 대한 비하적 기록이 많고, 일본이 서기 전 660년에 건국하여 1대 천황부터 만세일계로 내려오고 있으며, 3세기에는 일본의 진구(神功)황후라는 걸출한 여걸이 나타나 신라, 백제, 가야를 정벌하였다는 ‘임나일본부’ 설을 기록한 고서)등 일본의 고전을 연구 하였던 사람이다.
일본의 고전에는 한국과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이 없는 일방적이고 의도적인 기술이 많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황당하게도 이들 고전에 쓰여져 있는 허구의 신화적, 설화적 기재 내용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의 저서에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 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등장 한다.
- 3세기 말 일본의 진구(神功)황후는 삼한(백제, 신라, 가야)을 토벌했고 삼한은 일본의 조공국이 되었다.
- 3세기 말 진구황후의 삼한 침략은 신의 뜻이다. 그리고 1592년에 발생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도 신의 뜻이다.
- 4세기 오진(應信)천황 때 왜의 사람인 목만치(木滿致)가 임나의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고 4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 야마토(大和)정권은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두어 직접 한반도를 지배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역사적 근거 없는 설화적 허구라 할지라도 일본인의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크게 부각시켜야 한다고 굳게 믿은 사람이다.
그는 주저 없이, 진구황후의 삼한 토벌을 역사적 사실로 해석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조작된 저술을 만들어서 일본인에게 매우 취약했던 자긍심을 세운 인물이었다.
일본이 작은 규모라도 국가의 모습을 제대로 갖춘 것은 3세기 말경이다.
이 때 한반도에서 몰락한 가야, 백제 지배층이 대거 일본에 건너가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주민들의 지배층이 되었다. 그 앞의 1천여 년 동안의 천황인물 기록(1906년 간행의 ‘대일본사’)은 가공인물이라는 것이 동아시아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최근 이즈모(出雲) 왕조의 유물에서 한국계의 동탁(銅鐸)이 새로 발견되어 이즈모 왕조의 창립자는 한국에서 건너갔다는 증거가 확인되었다.
하지만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왜곡된 저술은 일본 역사학계에 한반도를 일본의 속국이라고 볼 수 있는 국학사관을 부각시키는 시각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국학사관을 배운 일본인의 뇌리에는 한반도가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사실무근의 픽션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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