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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세계 최초의 쌀농사 본문
인류고고학에 의하면 약 1만 3천~ 1만 년 전쯤에 빙하기가 끝나면서 구석기시대 역시 끝난다. 이 시기에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한반도 주변 해수면이 차차 높아져 얕은 바다 서해가 생겨났다. 서해의 평균 수심이 44미터, 발해만의 경우는 더 얕아 평균 수심이 22미터에 불과한데 조수 간만의 차는 커 8미터가 넘는 곳도 있다. 그러한 썰물과 밀물 작용 덕분에 해안가에 거대한 갯벌이 만들어졌다. 아시아 대륙의 유일한 대형 갯벌인 서해갯벌이 생겨난 이유이다. 갯벌에 여러 생물군이 번성하면서 사람들이 이를 채취하기 위해 바닷가와 강가의 갯벌과 모래밭 주위로 몰려들어 살게 된다. 우리의 신석기 유적이 대부분 해안가와 강가에서 발견되는 이유이다.
구석기시대의 인간은 겨우 사냥이나 식물채집 정도의 기술밖에는 알지 못했다. 대략 1만 년 전에 신석기시대가 시작하면서 인간은 물가 근처에 움집을 짓고 정착해 갯벌생물 채취와 어로생활을 하는 한편 곡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여 사육하게 된다. 바로 이때부터 인류의 문명이 크게 융성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 유적은 해안가와 강가 곳곳에 400개가 넘는다. 이는 갯벌생물 채취와 어로활동에 몰려드는 사람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 갯벌에서 채취한 조개더미는 해안가와 강가뿐 아니라 내륙에서도 발견된다.
빗살무늬토기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라 하면 이러한 갯벌채취, 어로활동, 농경과 목축에 의해 식량생산 경제가 전개된 문화를 가리킨다. 어로와 농경이 시작되면서 생선과 식량을 다듬고 보관하기 위해 간돌(간석기, 마제석기)과 토기가 만들어졌다. 간돌은 어로용으로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물추와 낚시축, 작살 따위가 중심을 이루는데 그물추가 특히 많은 걸로 보아 고기잡이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서해안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동해안에서 발견되는 토기와 달리 갯벌과 모래밭에 박아놓고 쓰기 편하게 대부분 밑바닥이 뾰족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우리의 빗살무늬토기가 뾰족밑유형 토기인 이유이다. 이것이 우리 신석기시대의 표지(標識)유물이다. 표지유물이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을 말한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세계 최초의 2만 년 전 신석기 유물
고고학에 따르면 인류가 최초로 뗀돌(뗀석기, 타제석기)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이다. 이른바 구석기시대의 시작이다. 그 뒤 뗀석기에서 간돌(간석기, 마제석기)로 발전하는 데 무려 69만 년이나 걸렸다. 1만 년 전쯤 간석기를 사용하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간의 정설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인 간돌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전남 장흥군 신북마을의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간돌 7점과 이를 만든 숫돌 2개 등 신석기 유물 20여 점이 발굴된 것이다. 이 유적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1만 8500년 전∼2만 55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중심연대는 약 2만2천 년 전이다.
신북구석기유적지는 2003년 국도 2호선 확포장 공사 중 교량 터파기 공사 때 문화층이 드러나면서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조선대 박물관 이기길 교수가 발견한 것이다. 그는 공사 중지를 요청한 후 2003년 7월부터 2004년 5월까지 발굴에 들어가 유물살포지 약 4만여 평 가운데 6천 여 평의 부지를 발굴했다. 그 곳에서만 무려 3만여 점의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다. 유적 면적 4만평은 국내 후기구석기 유적 중 최대 규모다. 또 발굴지 6000평에서 2만2천 년 전 유물 3만점이 한꺼번에 출토돼 유물 밀도 역시 매우 높았다. (출처; 장흥신문 2008.3.18.)
장흥 신북마을 신석기 유물
발굴된 유물 가운데 마제석기는 도토리 등을 갈 때 쓰는 갈돌 1점, 큰 동물을 자르거나 나무를 다듬을 때 쓴 간돌 자귀 2점, 그리고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홈석기 5점 등이었다. 홈석기는 돌의 위나 아랫부분 또는 테두리 부분이 홈처럼 파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뭔가를 빻고 곱게 가는 데 쓰인 도구로 추정된다. 이러한 마제석기들이 대부분 문화층의 중간과 아래에서 드러나서, 이제까지 ‘타제기법은 구석기시대’, 그리고 ‘마제기법은 신석기시대’라는 고정 관념을 재검토해야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리고 신북유적을 중심으로 반경 12㎞ 범위에 20여개의 구석기 유적군을 형성하고 있다. 또 신북유적에서 발굴된 흑요석의 성분분석 결과 원산지가 백두산 흑요석은 물론 일본 큐슈와 홋카이도 흑요석도 출토되어 신북유적의 후기구석기인들이 백두산 일대와 일본열도와도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그간 한반도에서 간돌 유물로 가장 오래된 유적은 1만 2천 년 전으로 추정되는 제주 고산리 신석기 유적이었다. 따라서 이보다 1만년 앞선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이 출토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마제기법이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사용됐다는 학계의 통설과 달리 이미 후기 구석기시대에 간석기를 만들어 썼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 고고학계는 ‘1만 년 전 신석기혁명’을 통해 처음 신석기를 썼다고 보고 있는데 한반도에서 무려 2만 년 전 신석기가 발견됨으로써 ‘1만 년 전 신석기혁명’ 이론을 무색케 했다.
2만 년 전 신석기 유물의 의미, 인류 최초의 농경 시작
신석기 유물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했음을 뜻한다.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하여 어로생활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가축을 기르는 등 식량 생산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이는 ‘신석기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인간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경제사를 제도발전 차원에서 다룬 공로로 1993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버클리 대학의 더글러스 노스 교수는 1만 년 전 신석기혁명이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큰 변화로 보았다. 그래서 이를 1차 경제혁명이라고 명명하고, 산업혁명을 2차 경제혁명으로 보았다.
수렵채취 사회는 부족원이 다 같이 사냥하고 채취하여 나누어 먹는 원시 공산사회였다. 인류의 역사를 250만 년이라고 보면 249만 년 간 평등한 공산사회에 살았다. 비록 배고픈 평등이었지만 말이다. 이에 반해 농경사회는 사적재산권을 인정해줌으로써 효율과 생산성을 극적으로 높였다. 그 뒤 사적 소유제라는 유인(誘引)으로 인류가 놀랍게 진보하였다.
세계적으로 구석기 유적에서 농경시대의 유물인 신석기 유물이 함께 발굴된 경우는 일본 나가노현 간노키 유적과 히비야 유적 그리고 우리 신북 유적 정도다. 당시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붙어 있을 때였다. 곧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최초로 용도에 맞추어 돌을 갈아 쓰기 시작한 사람들이 나타나 이들이 돌괭이와 돌칼 등을 만들어 땅을 파고 야생 곡물을 심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이들에 의해 인류 최초의 농경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는 약 기원전 9500년경부터, 인도에서는 약 기원전 6000년경부터, 고대 이집트에서는 약 기원전 5000년경부터, 그리고 중국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세계 최초의 쌀농사
청원 소로리 볍씨유물
우리의 농경이 일찍 시작되었다는 증거는 또 있다. 과거에 우리 벼농사는 중국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배웠다. 그런데 우리의 쌀농사가 중국보다 앞서 시작됐다는 주장이 있다. 쌀에 관한 한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농사가 시작된 곳이라 한다. 지금은 오창과학산업단지가 들어선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 지표조사 과정 중 구석기 유물들과 함께 고대 볍씨들이 발견되었다.
당시 출토된 볍씨는 고대벼 18톨, 유사벼 41톨 등 모두 59톨로 확인됐다. 볍씨뿐만이 아니라 이 유적 일대에는 찍개, 긁개, 홈날, 몸돌, 격지 등의 구석기 유물이 넓은 범위에 걸쳐 수습됐다. 출토된 볍씨는 야생 벼가 아닌 재배 벼였다. 고대 우리나라에는 야생 벼가 없었기 때문에 분명한 경작의 흔적이었다.
서울대학교의 방사선탄소연대측정 실험과 미국 지오크론시험소 유전자 분석결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1만 3000년~1만 5000년 전의 볍씨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왔던 중국 후난(湖南)성 옥천암 동굴에서 출토된 볍씨보다 2천~4천년이나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소로리 볍씨≫가 1만 5000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자 일부 학계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곧 1만 5000년 전은 구석기말 빙하기 끝 무렵인데 한반도에서 아열대 식물로 알려진 벼가 추운 기후에서 자랄 수 있었을까? 또 그 벼가 ≪야생 벼≫인지, ≪재배 벼≫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에 대해 국립 작물시험장 춘천출장소에서 냉해실험을 통해 벼가 자랄 수 있는 온도를 실험한 결과, 따뜻한 기후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벼가 기후적응을 잘하는 식물로 밝혀져 1만 5000년 전 학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볍씨를 분석한 교수들의 연구 결과, 소로리 볍씨는 재배 벼 특징을 갖고 있었다. 2003년도 필리핀에서 열린 ≪세계미유전학회≫에서 소로리 볍씨가 세계 최초의 볍씨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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