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kcha
한국이 일본에 전한 문화를 기록한 고서와 역사학자 본문
사학가 네즈 마사시 - nezu masashi : ”고유 일본인(固有日本人, 본래부터 일본에 살아온 선주민)은 석기와 토기를 사용해 채집과 사냥 및 고기잡이 활동을 했다 즉 한국인이 벼농사와 철기 청동기 및 노비 제도의 사회조직을 가지고 우선 기타큐슈에 들어왔다. 그 결과 일본에서 벼농사가 퍼지게 됐다
기타큐슈의 고분(무덤)에서는 한국인과 중국인에 가까운 고분인(古墳人)의 뼈가 나오고 있고, 그 자손이 현대 일본인이 됐다 또 6∼8세기의 아스카(飛鳥), 나라(奈良)시대에도 많은 한국인이며 중국인이 일본에 도래했으므로, 한층 더 그들에 가까운 것이 됐다”
(ねずまさし ‘天皇家の歷史’[上] 1989)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기타큐슈의 옹관묘 유적 출토품으로는 청동 제품이 많다.
이 출토품들은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주로 조선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北九州と南鮮’[日本の歷史] 1980)고 했다.
특히 한반도 도래인들의 고대 일본 지배 배경은 일본 기타큐슈 지방을 주축으로 진출하면서 벼농사를 비롯한 청동기며 철기 문화의 일본 전파가 그 바탕이 됐다.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 사토시 호라이 박사는 “한국인과 본토 일본인의 유전적 거리는 거의 영(0)이다”고 논문에 썼다. 즉 2,300년 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과 일본 원주민이 섞이면서 야요이 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가 시작됐고 융합이 서기 600년까지 계속되면서 현대 일본인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이주자들은 처음에 일본 규슈 지방에 먼저 정착하고 이어서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로 이주했다.
일본 돗토리 대학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 교수팀은 2003년 더욱 확실한 증거를 발표했다.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 전래로 상징되는 야요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전자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이노우에 교수팀은 야요이 시대 유적인 돗토리 현 절터와 사가 현에서 출토된 야요이인 유골 4점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했다. 그 결과 한국인과 혼슈의 일본인이 동일한 집단에 속했다. 유골이 발견된 돗토리 현은 동해와 맞닿은 혼슈 지방의 해안 도시이고, 사가현은 규슈 지방 북부에 있다. 두 곳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다.
일본에는 수만 년 전부터 동북아시아에서 들어온 아이누족, 류큐인 등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수렵이나 채집 생활을 했다. 기원전 4∼5세기경 한반도를 통해 도래인이 건너가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 및 토기 문화를 전파하면서 일본에서는 비로소 농업 혁명이 시작된다. 일본 문명의 원형이 만들어진 야요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가 남한, 중국, 혼슈 지방에 사는 일본 본토인, 오키나와인,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 등 모두 293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본토 일본인의 23%, 한국인의 27%가 같은 유형을 갖고 있었다. 반면 본토 일본인과 중국인은 서로 겹치는 유형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었고, 본토 일본인과 아이누 족은 같은 유형을 가진 사람이 6%에 불과했다.
USA 캘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 “discover誌“ 1998년 6월호 「일본인의 뿌리」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 시켰다.”
세계 문명사 탐구의 권위자 다이아몬드 교수의 이론
일본 역사학자 미즈노 유우(水野祐)는 그의 저서 ‘일본 고대 국가 형성’(고단샤·1978)에서
최초로 일본을 지배한 천황은 백제인의 후손인 15대 오우진(應神·4세기)천황과 16대 닌토쿠
(仁德·5세기)천황 부자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오우진 천황이 백제 복식을 입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이들 천황 부자에
의해 고대 일본의 가와우치(河內)왕조가 세워졌다고 주장
’부상략기’ 기록에 따르면, 당시 15대 오오진(응신)왕이 일본왕 최초로 한복(백제조복)을 입었으며, 그 후에 대대로 일본왕들이 입었고, 33대 스이코(추고: ?∼628년) 여왕 등극 때에는 참여한 만조백관 모두가 백제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18세기 고증학자 토우테이칸 은, 고대논문 「일본결척」을 인용하여 “응신왕 시대에 백제왕이 봉녀(縫女) 2명을 보내주어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이었다”고 지적했다.
여왕 등극 때에는 참여한 만조백관 모두가 백제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교수, “26대 게이타이 천황,백제 무령왕 친동생”
가토 에이코(加藤瑛子)교수 “26대 게이타이 천황,백제 무령왕 친동생”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 ) 교토대학 사학과 명예교수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국보급인 고대 ‘신찬성씨록’ 을 자택 서재에 보관하고 있다. 우에다 교수는 “비다쓰 천황은 백제 왕족입니다” 라고 확언했다(2004년 7월11일).
하야시 세이고(林靑梧)는 그의 저서 <일본서기의 암호>에서 “일본 왕통 혈족의 만세일계
(萬世一系) 세습제부터가 날조이며, 일본 개국왕은 김수로왕 후손임은 상식인데도 이를 부정,
징구왕후라는 유령을 내세웠다” 고 밝혔다. 또 “임나일본부 설치를 날조했을 뿐 아니라 오오진(應神)
왕이 백제계 부여(夫餘) 후왕인 의라(依羅)이며, 기토라 고분의 40대 텐무(天武)왕은 신라 김다수(金多遂)임에도 일본인으로 변조했다”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 ... 나라시대(奈良時代-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
(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 고 말해 전체적으로 일본고사기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구마모토 대학 시미즈 기요시(淸水記佳) 교수 ‘아나타는 한국인’ 에서 “오늘날 일본어의 모어
(母語)는 한국어이며,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신화와 전설은 전부 고대 한국인의 이야기다” 고 말했다.
토쿄대 사학과의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교수 ”일본은 고대 한국인이 세운 나라이다”(‘日本國家の起源, 1967)
카큐슈우인대 오오노 스즈무(大野 晋, 1919∼) 교수
”한국인은 일본열도에 금속 제조및 사용법 야금·금공 기술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
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조경술등 모든것을 가져왔다(‘日本語の 世界’, 1980)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인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교수는 ”조메이천황은 ’백제(구다라)
천황(百濟天皇)’이라고 말한다 .” 라고 1970년 ’신찬성씨록 연구’ 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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