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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민족론과 만한일국론으로 외연한 박은식 본문
박은식은 1911년 4월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으로 망명하여 윤세북(尹世復)의 집에서 1년여 기거하였다. 이 때 그는 대종교 교도가 되었고 고대사와 관련된 유적지를 답사하는 한편 다수의 고대사 저술을 남겼다. 그는 당시 8개월 동안 6~7종의 책자를 저술, 등사하여 학생들의 교재로 사용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단조사고』(檀祖事攷)를 말하는 것이다. 이같은 박은식의 망명 초기의 역사저술은 시기적으로는 고대사에, 지리적으로는 만주 일원에, 서술 대상은 영웅에, 종교적으로는 대종교와 간련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저술은 전통사학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을 탈피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향한 실천적 역사학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박은식은 종족에 대하여 조선족과 만주족은 모두 단군대황조의 자손이라 해석하고, 이를 대동민족(大東民族)이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강역에 대하여는 만한일국, 만한동족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같은 박은식의 민족사에 대한 종족과 강역인식은 『단조사고』의「배달족원류」(단군 혈통)와 「삼천단부」(단군 강역)의 도표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배달족원류」는 배달족의 단군혈통이 후세에 분파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조선·예·맥·북부여·옥저·숙신의 여섯 파로 분화가 시작되어 신라족이 여러 분파를 흡수하여 조선족을 형성하고, 고구려-발해-여진으로 이어지는 북부여족이 만주족을 형성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논리는 김교헌이 저술한 『신단실기』(神壇實記)의 「족통원류」(族統源流)와 유사하다. 또한 『신단민사』(神壇民史)의 「족통계보」(族統系譜)와도 유사하나, 조선족과 부여족을 일원적으로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한편 기자-마한-탐라를 반(半)배달족으로 보는 관점도 같다. 배달족의 원류를 이와 같이 인식하였기 때문에 단군 강역도 이에 따라 작성된 것은 물론이다. 발해의 민족사적 의의와 고구려 계승자임을 강조하면서 조선족이 아닌 만주족으로 그 계통을 설명한 것은 이러한 사유의 발로였다.
박은식은 『대동고대사론』의 제명에서도 ‘능칭만한’(能稱滿韓)이라고 덧붙일 정도로 만주와 한반도의 동질성을 확신하였다. 즉, ‘만주와 한국은 원래 한 나라이고 그 백성은 원래 동족이며 모두 단조의 신성한 후예이다’라고 파악한 것이다. 이는 그의 『몽배금태조』등 일련의 저술에서 공통된 인식이다. 그는 수산 이종휘(李種徽)와 성호 이익(李瀷),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저술을 인용하며 이를 입증하였는데, 이로써 그가 실학적 역사인식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가 여진족까지 동족으로 간주한 것은 신채호가 부여족을 주족(主族)으로 설정하고 여진족을 객족(客族)으로 이해했던 것과는 다른 인식체계이다. 오히려 그는 종족과 고대사의 범위를 대동[滿韓]으로 외연하였던 것이다.
박은식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고구려 7백년의 역사는 우리 대동민족이 가장 강용활발한 기상으로 독립자주의 가격을 세계에 발표한 영예적 역사’라고 하였다. 또한 자주독립이란 측면에서 고구려가 지니는 민족사적 의미를 추구하며, 고구려의 기상을 부활시킬 것을 역설하였다.
“…우리 사천년 역사에 가장 자주독립의 자격이 완전하여 신성한 가치가 있는 것은 고구려시대이다. 대개 고구려는 최초 건국하는 날부터 사면의 강적과 혈전하여 그 기초를 수축(修築)하였고 7백여년 동안에 우리 민족의 활발용장한 기상이 어떠했고 … 실로 세계 민족에 대하여 필적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 금일에 이르러 아무쪼록 고구려의 역사를 숭배하고 기념하여 우리의 인(仁)과 법신(法身)과 우리의 곡신(谷神)과 우리의 영혼이 이 세상에 부활하여 인류의 자격에 참예(參預)할지로다. … ”
그가 고구려를 강조하며 자주독립을 강조한 것은 망국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천개소문이 비록 인륜도덕의 기준에서 평가할 때 죄가 있다 하더라도, 개인주의와 국가주의에서 ‘독립자주자’였기 때문에 4천년 역사에서 짝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높게 평가한 것과 일맥 하는 것이다. 한편 한사군에 의해 세계상에 말살된 조선역사를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설함으로써 ‘우리 조국을 광복’시킨 것이며, 고왕이 발해를 건국함으로써 구지하에 침몰된 고구려 역사를 계승하고 ‘우리 민족을 구제’ 하였다고 서술하였다. 특히 그는 발해 태조가 일개 ‘망국포종’ (亡國逋踪)으로서 5천리 대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망국의 통한을 서사필설(誓死必雪)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를 독자들이 중가연구(重加硏究)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의 역사연구에서 최고의 가치는 독립·자주·조국 광복·국토 회복·민족 구제·국민 갱활이라는 현실적 과제의 해결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은식의 고구려 중심 인식은 발해에 대한 강조로 연결된다. 그는 우리가 망국의 지경에 빠진 것은 역사학이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국민교육계에서 제일 필요한 것으로 본국지리와 본국역사를 꼽았다. 따라서 그는 국민교육의 보조로서 『발해태조건국지』를 저술한 것이었다. 그가 발해사를 저술한 것은 발해의 멸망 이후 발해사가 찬수되지 않음을 제일 가비가통(可悲可痛)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신라와 발해의 병립시기를 남북조시대라 명명하고, 발해사의 시작을 고구려 말기부터 서술함으로써 계통의 승계자임을 강조하였다.
“옛날 대동에 고구려와 신라와 백제의 정치(鼎峙)는 삼국시대요 신라와 발해의 병립은 남북국시대라. 발해는 고구려의 구강(舊疆)을 근거하여 고구려의 계통을 승계한 나라인 고로 발해 건국초기를 서술함에 고구려의 말운(末運)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 그 강토는 고구려의 구물(舊物)이요 그 씨족은 고구려의 동종이라 발해사로써 고구려의 계통을 승계함이 역사의 정례(正例)요. 하물며 대씨(大氏)가 세세로 고구려에 벼슬하여 중상(仲象)과 조영(祚榮) 2세가 모두 고구려의 장수가 되었으니 발해의 건국이 즉 고구려의 흥복(興復)함이다.”
그는 발해와 고구려가 강토와 씨족이 같기 때문에 민족사의 계통을 승계한 것은 역사의 정례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그는 발해의 건국이 곧 고구려의 흥복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는 발해의 태조와 함께 해동성국을 건설한 선왕(宣王)의 정치적 수완을 주목하였다.
그가 저술한 『발해태조건국지』는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사가들의 고구려·발해 인식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저술이라 할수 있다. 이같은 그의 인식은 『명림답부전』과 『발해태조건국지』의 말미에 수록된 「역사가」(歷史歌)로 집약된다.
한편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대조영이 속말부 사람으로 고구려 숙장이었으나, 귀양가던 중 동모에서 잔여인을 모아 일거에 고구려 강역을 회복하고 발해를 건국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본서의 결론에서는 발해사를 저술하지 않아 발해사가 말살된 것을 개탄하며, 자신이 한국혼 사상에 의해 『한국통사』를 저술하는 까닭을 설명하였다.
이는 당시 신규식이 지녔던 인식과 거의 일치한다. 신규식은 1914년 『한국혼』을 저술하며, 이를 ‘통언’ (痛言)이라고 하였다. 또한 ‘대한혼' 사상을 강조하였으며, 망국의 원인으로 국사를 망실하였음을 지적하였다. 특히 발해가 당당한 우리 민족사로서 대씨(大氏)가 대를 이어 굴기하여 국외에 위엄을 떨쳤으나, 발해사가 편찬되지 않아 그 장엄한 역사가 전해지지 않음에 안타까움을 표하였다. 신규식은 비록 구체적인 역사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망명 인사의 역사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편찬한 관찬 사서로서 민주공화정 시기 최초의 사서로 평가되는 『한일관계사료집』도 발해를 민족사로 수용하여 서술하였다. 본서는 한일관계사를 정리하며 무왕 때 일본과의 사신왕래와, 건황왕 때 역을 전수해 준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발해사를 민족사로 서술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와 관련된 인사나, 임시정부자체의 고구려·발해인식의 일단을 알 수 있다.
*박걸순 / 독립기념관 학예실장
http://www.independence.or.kr/KO/Study/History/appl/Goguruy_02.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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