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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kcha
1965 년 한일 조약 체결 때 한국과 일본의 GDP 차이는 100 대 1이었다라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3 대 1 인구 비율로 보면 2.5 대 1 (즉 별 차이 없다는뜻) 한국의 가파른 성장세에 대한 공포가 "혐한"의 심리적 기반인 것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국식 마카롱인 "뚱카롱" 프랑스 30년차 제과장도 배울려고 한국까지 찾아옴 서울에서 난리난 "대왕 타코야키" 한국이 개발한 타코야키+오코노미야키+몬자야키 를 퓨전한 음식 본고장 일본에서도 맛있다고 체인점 내달라며 사정 하는 중 한국에 관광오는 미국인들이 ..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1884년 전주 한정식과 주막 스케치 [오마이뉴스 김선흥 기자] 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
둘이 같으니까 서로 유신체제.유일체제 내통하며 독재한거지~~~ㅋ 필요하면 서로 도발해줬다고 본다....ㅋㅋㅋ 수꼴들은 이승만 박정희 같은 애들을 빨면서 김일성은 왜 욕하는지 의문
아시아에서 유명한 도시 중 하나, 미래와 과거가 공존하고 자연친화적인 도시라며 외국인들도 감탄하는 수도 서울을 보잘것 없는 도시로 격하. 대중음악 전문가도 아닌 놈이 다양한 장르가 존재하고,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활동하는 대한민국 음악계 격하. 수많은 실력있는 밴드가 존..
연꽃모양의 백운모판. 백운모판으로 연잎 사이에 마름모꼴 금박을 넣어 장식한 이 유물은 각각의 연잎을 따로 만들고, 중심은 둥근 원형판이 겹친 형태였다. 운모판의 두께는 0.008㎝였다. 그야말로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부서질세라 얇디얇은 판이었다.|문화재청 제공 원문보기: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4011207001?utm_source=urlCopy&utm_medium=social&utm_campaign=sharing
일제시대 때 조선인들이 러시아의 사할린으로 이주 함. 그때 사할린 남부는 일본 영토였기 때문. 2차 대전 종료 후에는 모조리 러시아에 반환. 이후에 조선에 돌아오지 않고 정착한 경우가 많았는데 사할린이 농사를 할 수 있는 땅도 아니고 척박해서 현지 러시아인들은 굶을때가 많았는데 이주한 조선인들은 잘 먹고 살았음 조선인들 입장에서는 뒷산 가면 나물도 많고 바닷가 가면 조개랑 낙지가 널려있음. 러시아인들이 굶는게 이해 안간거임 러시아인들도 '저게 먹는 거였어?' 하다가 나중엔 굶는거 보단 나으니 따라 먹기 시작해서 식문화가 바뀜. 현재 사할린에 가보면 동네 뒷산에서 고사리 채집하는 러시아 처녀들 널림 https://www.youtube.com/watch?v=qW4hz_p0jag
인류고고학에 의하면 약 1만 3천~ 1만 년 전쯤에 빙하기가 끝나면서 구석기시대 역시 끝난다. 이 시기에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한반도 주변 해수면이 차차 높아져 얕은 바다 서해가 생겨났다. 서해의 평균 수심이 44미터, 발해만의 경우는 더 얕아 평균 수심이 22미터에 불과한데 조수 간만의 차는 커 8미터가 넘는 곳도 있다. 그러한 썰물과 밀물 작용 덕분에 해안가에 거대한 갯벌이 만들어졌다. 아시아 대륙의 유일한 대형 갯벌인 서해갯벌이 생겨난 이유이다. 갯벌에 여러 생물군이 번성하면서 사람들이 이를 채취하기 위해 바닷가와 강가의 갯벌과 모래밭 주위로 몰려들어 살게 된다. 우리의 신석기 유적이 대부분 해안가와 강가에서 발견되는 이유이다. 구석기시대의 인간은 겨우 사냥이나 식물채집 정도의 기술밖에는 알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