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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kcha
동이(東夷)는 구이(九夷)라고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다. 구이(九夷) 중 사이(四夷)라 했으므로, 먼저 여기서 九夷에 대하여 적어본다. ①견이( 夷) ②우이(于夷) ③방이(方夷) ④황이(黃夷) ⑤백이(白夷) ⑥적이(赤夷) ⑦현이(玄夷) ⑧풍이(風夷) ⑨양이(陽夷)이다. 또한 삼국유사(三國..
"동아시아 침술, 한반도 북부 두만강 유역서 시작됐다" 고고학자 강인욱·한의학자 차웅석 소영자 유적서 나온 골침과 석침, 치료용 '침'의 초기 형태로 결론내 "중국보다 앞선 침술 문화 있었다" "동아시아의 침술 전통은 '한의학의 본향'으로 알려진 중국이 아니라 한반도 북부 두만강 유역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침술을 사용한 사람들은 옥저(沃沮)의 조상이었고, 이후 침술 전통은 고구려로 계승됐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11/2018011100165.html?rsMobile=false 세계 최초 공중보건의서 '동의보감' 국보 승격 지정 예고.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동의보감(東醫寶鑑..
위에 도표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뒤, 토지 조사를 통해 기록한 한반도의 경지 면적입니다. 특이 사항은 1910년에 210만 헥타르에 머물던 경지면적이 1919년 조사에서 415만 헥타르로 두배 가까이 증가 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일제에 의해 경지면적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조사 대상에서 누락됐던것이 장부에 기입된것을 의미합니다. 또하나 특이점은, 일제가 1920년 부터 산미증산계획을 내세우며 경작지 증가를 독려했음에도, 이후 미미한 증가만 보였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미 한반도 경지면적 증가가 포화상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반도 전체 면적은 세종시절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한 뒤 큰 변화가 없습니다. 조선 왕조가 농업을 중시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세종 말기에는 경작할 토지는 대부분 경작지..
박은식은 1911년 4월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으로 망명하여 윤세북(尹世復)의 집에서 1년여 기거하였다. 이 때 그는 대종교 교도가 되었고 고대사와 관련된 유적지를 답사하는 한편 다수의 고대사 저술을 남겼다. 그는 당시 8개월 동안 6~7종의 책자를 저술, 등사하여 학생들의 교재로 사용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단조사고』(檀祖事攷)를 말하는 것이다. 이같은 박은식의 망명 초기의 역사저술은 시기적으로는 고대사에, 지리적으로는 만주 일원에, 서술 대상은 영웅에, 종교적으로는 대종교와 간련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저술은 전..
1922년(大正11년) 12월 (조선총독부는) 다음과 같이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을 발포(發布)했다. 제1조 조선총독부에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둔다. 위원회는 조선사의 편찬 및 조선사료의 수집을 담당한다.제2조 위원회는 위원장 1인과 위원 약간 명으로 조직한다. 위원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임한다. 위원은 학식있는 자 중에서 조선총독이 위촉한다. 전항(前項)에 규정한 이외의 위원은 조선총독부 내부의 관리 중에서 조선총독이 임명하거나 또는 위촉할 수 있다. 제3조 위원장은 회무(會務)를 총괄한다. 위원장 유고시에는 위원장이 지정한 위원이 그 사무를 대행한다.제4조 위원회에 편찬주임을 두고 위원중에서 위원장이 임명한다.제5조 위원회에 고문(顧問)을 둘 수 있다. 고문은 조선총독이 위촉한다.제6조 위원회에 간..
함경도 나진시의 초도 유적(기원전 2000년~기원전 1000년)뼈바늘이 담긴 뼈바늘통, 직물에 달았을 6.5센티의 청동단추, 청동 가락지, 둥글고 긴 대롱 형태의 옥 발굴 https://blog.naver.com/ipa1983/220449504957 ▣ 고조선 때 견직물과 삼베, 가죽, 그리고 풀로 옷을 해 입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동방(東方 ; 우리나라를 지칭)에는 예전에는 임금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매, 백성이 이를 군(君 ; 임금)으로 세우니, 이가 단군(檀君)이다. 혹은 이르기를 그 이름은 왕검(王儉)이고, 국호는 조선이라 하였는데, 당(唐)나라 요(堯)임금 25년 무진년인 기원전 2333년과 같은 때라 한다. 단군이 백성에게 편발(編髮 ; 머리 땋는 것)..
‘한민족 문화전파 사례’ 묶어 책으로 펴내 ▲ 고구려 삼실총 벽화의 완함 연주 장면. 지식산업사 제공 ▲ 중국 돈황 막고굴 220굴의 호선무 장면 부분도 “공자도 동이에서 살고 싶어했다(故孔子欲居九夷也).”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에서 ‘구이(九夷)’는..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1884년 전주 한정식과 주막 스케치 [오마이뉴스 김선흥 기자] 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
연꽃모양의 백운모판. 백운모판으로 연잎 사이에 마름모꼴 금박을 넣어 장식한 이 유물은 각각의 연잎을 따로 만들고, 중심은 둥근 원형판이 겹친 형태였다. 운모판의 두께는 0.008㎝였다. 그야말로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부서질세라 얇디얇은 판이었다.|문화재청 제공 원문보기: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4011207001?utm_source=urlCopy&utm_medium=social&utm_campaign=sharing
일제시대 때 조선인들이 러시아의 사할린으로 이주 함. 그때 사할린 남부는 일본 영토였기 때문. 2차 대전 종료 후에는 모조리 러시아에 반환. 이후에 조선에 돌아오지 않고 정착한 경우가 많았는데 사할린이 농사를 할 수 있는 땅도 아니고 척박해서 현지 러시아인들은 굶을때가 많았는데 이주한 조선인들은 잘 먹고 살았음 조선인들 입장에서는 뒷산 가면 나물도 많고 바닷가 가면 조개랑 낙지가 널려있음. 러시아인들이 굶는게 이해 안간거임 러시아인들도 '저게 먹는 거였어?' 하다가 나중엔 굶는거 보단 나으니 따라 먹기 시작해서 식문화가 바뀜. 현재 사할린에 가보면 동네 뒷산에서 고사리 채집하는 러시아 처녀들 널림 https://www.youtube.com/watch?v=qW4hz_p0jag